회사 다니고 12년 만에 처음으로 메일에 부재중 자동응답이라는 걸 걸어봤다. 설정하는 데 3분도 안 걸리는 걸 여태 왜 못 했나 싶고. 계기는 별거 없다. 여섯 살 딸이 어린이집에서 바다 그림을 그려왔는데, 그림 속에 우리 가족은 없고 물고기만 있었다. 아내가 그걸 냉장고에 붙이면서 한마디 했다. 올여름엔 진짜 가자고.

그래서 나트랑 가족여행이었다. 아이가 있으니 이동 많은 일정은 자신이 없었고, 작년에 다녀온 회사 선배가 빈펄 리조트면 섬 안에서 다 해결된다고 했다. 예약은 선배가 알려준 티그룹이라는 데서 했는데, 항공만 빼고 단독 일정을 통으로 짜줬다. 견적은 4인 기준. 우리는 어른 둘에 애 하나라 물어봤더니 가족 단위는 보통 그렇게 잡는다고 했다.

출발 전날 밤에 걸어둔 자동응답은 이랬다.

✉ 자동 회신 · OUT OF OFFICE
제목  부재중 자동 회신
7월 20일(월)까지 휴가입니다. 나트랑에 있습니다.
급한 건은 최 대리에게 부탁드립니다. 사실 급한 건일수록 최 대리가 더 잘 처리합니다.
나트랑 빈펄 리조트 혼째섬 수영장
혼째섬 리조트의 둥근 수영장 바. 도착하자마자 딸이 여기서 살자고 했다.

깜라인 공항을 나오니 빈펄 피켓을 든 직원이 서 있었다. 7인승 차로 부두까지 40분쯤, 거기서 스피드보트로 10분이면 혼째섬이다. 여섯 살은 그 10분짜리 보트를 이번 여행에서 두 번째로 좋아했다. 1등은 뒤에 나온다.

체크인할 때 얼굴 등록이라는 걸 하길래 했는데, 해두면 조식 들어갈 때 카드 키를 안 꺼내도 된다. 이게 그렇게 편할 줄 몰랐다. 첫날은 그냥 리조트 안에서 끝. 수영장 갔다가 저녁 먹고 뻗었다. 참고로 이 일정은 조식만 포함이고 점심 저녁은 각자인데, 섬 안에 식당이 여러 곳이라 첫날은 고민 없이 그중 한 곳에서 해결했다.

밤에 습관처럼 폰을 열었다가 메일 아이콘에 숫자가 잔뜩 붙은 걸 보고 도로 껐다. 그 대신 답장을 머릿속으로만 썼다.

✉ 회신 (보내지 않음) · 1일차
제목  RE: 3분기 자료 요청
김 과장님, 자료는 공용 서버에 있습니다.
저는 지금 바다 건너 섬에 있고요. 5초만 부러워하시고 서버 열어보세요.
나트랑 혼째섬 케이블카
부두 위로 케이블카가 지나간다. 바다 위를 건너 섬으로 들어가는 기분이 묘하다.

둘째 날이 본게임, 빈원더스. 이용권이 일정에 포함이라 표 사는 줄을 안 섰다. 놀이공원에 워터파크에 동물원, 식물원, 아쿠아리움까지 한 덩어리인 곳이라 아침에 지도를 보고 살짝 아득했는데, 결론부터 말하면 하루에 다 못 본다. 못 보는 게 정상이다.

7월 한낮은 정말 덥다. 우리는 문 여는 시간에 맞춰 들어가 야외 놀이기구를 먼저 돌고, 제일 더운 시간엔 아쿠아리움이랑 실내로 피신했다가, 오후에 워터파크로 갔다. 이 순서는 지금 생각해도 잘한 일. 중간에 스콜이 한 번 쏟아졌는데 20분 만에 그치고, 그친 다음이 오히려 시원했다. 돌고래쇼에서 딸이 처음으로 소리를 질렀고, 무동은 다섯 번 태웠다. 어깨가 아직 뻐근하다.

참, 섬 안에서는 버기카가 수시로 다녀서 걷다 지치면 손 들고 타면 된다. 아이 데리고 다니는 집엔 이게 은근 크다.

✉ 회신 (보내지 않음) · 2일차
제목  RE: 회의 일정 조율
회의는 다음 주에 하시죠.
저는 방금 돌고래를 봤습니다. 이 문장을 이길 수 있는 안건이면 그때 올려주세요.
나트랑 빈펄 혼째섬 해변 물놀이
해변 앞 바다에 떠 있는 물놀이 시설. 딸이 이번 여행 1등으로 꼽은 게 이거다.

셋째 날은 시내로 나갔다. 보트 시간만 미리 맞춰두면 나가는 건 어렵지 않다. 시내에서 가이드님을 만나 반나절 같이 움직였는데, 가고 싶은 데를 말하면 맞춰주는 식이라 편했다. 우리는 담 시장을 구경하고, 콩카페에서 코코넛 커피를 마셨다. 아내는 이거 마시러 나트랑 또 온다고 했다. 점심은 랑응온이라는 식당에서 이것저것 시켰다. 이날 점심 저녁은 포함이 아니라 사 먹었는데, 물가가 착해서 부담은 없었다.

리조트 섬이 워낙 다 갖춰져 있어서 안 나가도 그만이긴 한데, 나트랑 자유여행 기분 내보고 싶으면 하루쯤은 나와서 시장 구경을 하는 걸 추천한다. 애도 시장을 의외로 좋아한다. 저녁엔 야시장을 잠깐 들렀다가 보트를 타고 들어갔다. 시내까지 왕복 이동이 좀 되니 그날 낮잠은 포기해야 한다.

나트랑 담 시장
셋째 날 나간 시내의 담 시장. 둥근 지붕이 멀리서도 보인다.

마지막 날은 비행기가 저녁이라 걱정했는데, 체크아웃을 하고도 오후 6시까지 리조트 부대시설을 쓸 수 있었다. 덕분에 마지막 날까지 수영장에 있다가 나왔다. 이건 진짜 잘 만든 규칙 같다.

아, 예약할 때 얘기 하나. 결제 전에 티그룹에 실제 다녀온 분들 이야기 같은 거 있냐고 물었더니 카톡 캡처 몇 장을 보내줬다. 대부분 골프 치러 간 분들이라 우리랑 결이 다르긴 한데, 하나같이 일정이랑 기사님 칭찬이라 그걸 보고 마음을 정했다.

티그룹 고객 카카오톡 메시지 티그룹 고객 카카오톡 메시지

「좋은 일정 덕분에 즐거운 여행이었습니다. 다음에 또 연락드릴게요」 — 티그룹 실제 고객, 성함 비공개

나트랑 시내 식당
저녁 먹으러 간 시내 식당 (이미지). 뭘 시켜도 애가 잘 먹어서 편했다.

복귀한 날 아침, 밀린 메일의 첫 회신은 이렇게 시작했다.

✉ 복귀 회신 · 출근 첫날
제목  RE: 다들 별일 없으셨죠
저는 별일이 아주 많았습니다. 좋은 쪽으로요.
자료 회신은 오늘 중으로 드립니다. 어깨가 아직 뻐근해서 타자가 조금 느립니다.

비용은 4인 기준 1인 지상비 42만 원대였고 항공은 별도. 혼째섬 리조트 3박에 조식, 빈원더스 이용권, 깜라인 공항 픽업, 가이드까지 들어 있는 값이라 셈해보면 나쁘지 않다. 별점을 매기라면 ★★★★☆. 반 개를 깎은 건 순전히 7월 더위 때문인데, 그건 나트랑 잘못이 아니라 달력 잘못이다.

혹시 아이 데리고 나트랑 3박4일 계획이 있으면, 카카오톡에서 티그룹을 검색해서 아이 나이를 미리 말해두시길. 우리처럼 어린이집 그림 한 장 때문에 떠나게 됐다고 하면 아마 웃으면서 일정을 짜줄 거다.

Kakao Tal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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